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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COGRAPHY/LOG

[반야로/단마리]PAUSE

by 빙마와리 2022. 4. 21.

2부 1장 붕괴의 개막... 단테님 시점...

당시 스토리 보고 저에 영혼의 시간이(?) 일시정지했기 때문에 글 제목도 일시정지입니다(농담 반 진담 반)

 

 

 

 

 


 

 

 

 

 

 붕괴는 급작스럽게, 또 빠르게 들이닥쳤다.

 갑자기 허리를 앞으로 푹 꺾었다가 간신히 고개를 든 튜너의 피투성이 얼굴도, 신랄한 비웃음을 심지 삼아 옮겨간 악의의 폭발도, 그 악의에 휩쓸려 무너지는 라이브 회장의 사해와 비처럼 쏟아지는 스테인드글라스의 파편도, 그리고,
 그 아수라장 한가운데에 망연히 서 있는 히마와리의 걸음과 푹 숙인 고개 아래의 텅 비어버린 눈빛, 그 위로 드리우는 짙은 그림자도.

 왜 움직이지 않는지, 왜 걸음을 멈추고 말았는지. 그 이유를 헤아릴 틈 따윈 주어지지 않았다. 여태 자신이 보아온 히마와리의 이면에 분명 답이 있을 테지만, 그런 걸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상념에 발목을 잡히는 즉시 재해로 이어질 상황 속에서, 단테는 가능한 한 급하게 그림자 아래의 인물에게 내닫았다. 신장만큼이나 큰 보폭은 금세 히마와리에게 다다랐으나 제 이름 넉 자를 부르는 음성에 두어 박자 늦은 반응을 목도한 단테는 그 순간 말을 잃고 말았다.
 그토록 투명하게 맑았던 눈에는 빛이 들지 않고 저와 눈을 마주하려 들지 못했다. 손은 금방이라도 목에 건 펜던트를 쥐어뜯을 것처럼 힘이 들어가 있었고, 발은 뒷걸음질을 치듯 뒤로 물러나는 듯한 형상으로 움찔대고 있었다. 다시 시선을 들어 맞닿은 눈빛으로부터 단테는, 전에 없던 두려움을 발견했다. 그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테에게 패배를 선사한 히마와리 본인을 향한 실망과 분노, 그리고 그로 하여금 쓸모를 잃고 버려지지 않을까 하는 공포였음을 단테는 어쩔 수 없이 통감하고 말았다. 고작 몇 초라는 짧은 순간 스쳐 간 잡념이었으나, 그 찰나는 두 사람을 덮치는 위협에 아주 좋은 기회가 될 것이었다.

 단테는 일순 히마와리의 감정에 동요하고 만 것을 후회했다. 그럴 때가 아니라고 속으로 몇 번을 되뇌었을 터다. 히마와리가 어떤 상태든 간에 다그치고 달래는 것은 이 상황을 모면한 뒤라도 상관없다고. 그러니 당장은 이곳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그랬을 텐데. 적나라하게 엿보이는 불안과 자기 자신을 향한 부정이 목에 걸린 듯 숨통을 막아 차마 지나칠 수 없었다. 제 것이 스스로의 속을 헤집고 망가지는 것만은 두고 볼 수 없었으므로. 감출 수 없는, 감출 생각조차 없는 애정이 독으로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히마와리와 함께 자리를 벗어날 수 없음을 직감했다. 최악의 경우 두 사람이 함께 이곳에 매몰될 것이며 차악이자 최선은 미처 피하지 못한 머리 위의 파편을 ‘한 명’이 막아 ‘다른 한 명’을 구하는 것……. 고민은 길지 않았다. 단테는 유리 조각에 야트막한 생채기가 난 팔을 잡아당기고 힘없이 끌려온 몸뚱이를 제 품에 가두었다. 가늘게 떨리는 숨소리는 얕았고, 그와 대조적으로 자신의 숨은 깊고 차분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포옹치고는 아쉽기 짝이 없다. 답지 않게 끝을 상정하는 단테의 입꼬리가 올라간 그때.

 ——!
 —…….

 둔탁한 소리는 바닥이 아닌 살갗 위로 무너져 내렸고, 얇은 입술 사이에서는 채 삼키지 못한 고통이 배어났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반발하듯 크게 들썩인 몸은 방금까지의 굳건했던 자세를 잃고 무너져 작고 둥근 어깨에 간신히 지탱해 섰다. 단테는 등에서부터 퍼져나가는 끔찍하도록 뜨거운 고통에 아득해져 오는 정신을 다잡기 위해 눈을 몇 번이고 고쳐 떠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겨우 지켜낸 제 것이 제 무게에 짓눌려 죽어버릴 터였다. 물리적인 무게뿐만이 아닌, 죄책감의 무게에 숨이 막혀서. 어……. 멍한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그로부터 몇 초가 지난 후. 얕았던 숨이 거칠게 달싹이고, 어깨를 포함한 온몸이 덜덜 떨려오기 시작한다.

 “어, 어……? 방금, 뭔가…… 왜, 왜 그래 단테……? 왜, 이렇게 몸이 축축, 하고…… 아.”

 간헐적으로 내뱉는 말은 차라리 울음에 가까웠다. 보지 않아도, 잡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자신을 감싼 몸을 더듬는 손은 필시 핏기가 가셔 차게 식었으리라는 것을. 지난겨울, 배 위에서도 시도 때도 없이 얼어붙어 제 체온을 빌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손을 데우는 것은 안심이 될 만큼 넉넉한 손아귀가 아닌, 끈적하고 비릿한 액체일 것이었다. 제 손에 엉겨 붙은 붉은 것을 확인한 히마와리의 표정이 급속도로 굳는다. 손뿐만이 아니라 얼굴마저 창백하게 질려가고 있었다.

 “……히마와리.”
 “단, 테…… 나, 내가, 당신이, 왜…….”
 “정신 차리고, 내 말을 들어.”

 정말로 정신을 차려야 하는 게 누구인지. 단테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을 억지로 들어 올려 작은 머리 위에 올리고 짐짓 웃어 보였다. 웃으려고 했는데 잘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히마와리의 눈은 저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니 달리 확인할 방도가 있을 리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그저 제 손이 피에 젖지 않아 머리를 쓰다듬어줄 수 있다는 게 다행일 뿐이다.

 “나는 이 정도로는 죽지 않아. 그러니 걱정 말고, 여길 빠져나가라.”
 “…………싫,”
 “이런 상황에서 내가 어떤 말을 할지는, 너도 잘 알고 있겠지.”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걸음을 멈추고만 싶은 상황에서 단테의 말은 빛을 발했다. 그것은 히마와리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절망을 잘 아는 그가, 절망 한가운데에서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인 그의 뼈대나 다름없는 문장.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눈부시고 곧아서, 지금의 히마와리로서는 버거운 말이었다. 싫어, 그런 말을 들어버리면, 그런 말을 해버리면 나는,

 “히마와리, 어서.”
 “……절망은, 걸음을 멈출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옳지. 그거면 됐다.”

 그 말에 와락 표정을 일그러트리는 것이 비통하다. 그런 표정을 짓게 하고 싶진 않았는데. 점차 몽롱해져 오는 머리를 히마와리에게 기댄 채, 마지막으로 응석을 받아주었다.

 “서로의 의지가 교차하는 때에, 다시 만나자고.”

 그러니 지금은 작별이다. 히마와리에게 지탱하던 몸을 가까스로 추스른 단테가 작은 등을 강하게 밀쳐내었다. 그 반동으로 단테의 몸이 뒤로 넘어갔고, 여전히 라이브 회장은 크고 작은 재앙을 쏟아내고 있었다. 엷고 짙은 그림자가 어지러이 진 바닥에 나자빠진 단테는, 히마와리가 뒤를 돌아보지 않길 바랐다. 자신이 그 걸음을 멈춰 세우는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헛된 이정표가 되지 않도록. 다행히 히마와리는 고개 한번 돌리지 않은 채 비틀거리는 다리로 필사적인 달음박질을 멈추지 않았다. 어쩐지 위태로운 걸음은 마치 누군가에게 억지로 끌려가는 것만 같아서, 흐리게 가라앉은 심홍빛 눈을 애써 들어 올려 신경을 곤두세우니 들려오는 것은, 그 보폭에 맞춰 차르르 쏟아지는 익숙한 소리. 견고하고 차가운 쇠사슬 소리가 좌우로 번갈아 땅을 딛는 발자욱과 주먹을 꾹 쥔 팔의 박자에 맞추어 울려 퍼지는 것이었다.
 내 말이 기어이 네 족쇄가 되고 말았구나. 환청이라 하기에는 지독한 구석과 들어맞는 그 소리를 향해 단테는 짧게 탄식했다. 제 것에게 잔혹한 부담을 지운 셈이었다. 이로써 히마와리는 결코 걸음을 멈추지 못하리라. 자신이 남긴 말에 의해, 절대적인 타인의 의지에 의해서. 걸림돌보다는 족쇄가 되는 편이 낫지만 그 역시 단테가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축복보다 저주와 어울리니 말이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유독 크고 무거운 소리가 땅을 울렸다. 그에 놀라 뒤를 돌아본 히마와리의 시야에는 더 이상, 사람의 형체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토록 너른 품으로 자신을 감싸안았던 단테가 분명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할 텐데도. 이해하고 싶지 않은 광경과 그럼에도 스멀스멀 형체를 갖추어 가는 불길한 예감이 제자리를 찾은 퍼즐처럼 맞물린다. 완성된 그림은 결코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최악의 가정. 이를 깨달은 직후 터져나온 비명 같은 울음은 먼지바람과 함께 탁하게 부유하는 것이었다
.

 

*   *   *

 


 고요한 어둠 속에서 단테는 눈을 떴다. 온몸이 부서질 듯 쑤셔오고, 특히 등은 이미 감각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자신이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 눈을 뜬 것인지 감은 것인지, 정녕 살아 있기는 한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공간에는 그에 대한 답을 내려줄 사람이 없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에 힘을 주자 손끝만이 움찔하며 바닥을 긁는다. 손톱 아래의 여린 살을 날카로운 파편 여럿이 스치고 지나간 후에야 단테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싸늘한 접촉 뒤의 뜨겁고 알싸한 기운. 죽은 몸이라면 이까짓 사소한 고통 따위는 느끼지도 못했으리라.

 “살아 있나…….”

 끈질기게도 붙어 있는 숨을 인지하고 나니 이곳저곳의 몸 상태 역시 덩달아 느껴지기 시작한다. 한쪽 다리가 심하게 쓸리다 못해 발목이 접질려 있다는 것, 눈꺼풀이 참으로 무거운 상태라는 것, 속눈썹에 점도 높은 액체가 말라 굳은 탓에 눈을 뜨기 어렵다는 것 따위의 사실들이었다. 버겁기는 하나 손이 움직인다는 것 역시 확인했다. 하여 움직이는 팔을 들어 눈가에 엉겨 붙은 이물질을 털어내고 눈을 비집어 열자, 어둠에 익은 몸답게 주변의 광경을 쉬이 물색할 수 있었다. 크고 작은 무대의 잔해를 방벽 삼아 기적적으로 형성된 좁은 공간 속, 난리 통에 주인을 잃고 매몰된 악기들과 그 위로 쏟아진 무채색의 무더기가 시야에 들어찬다. 개중 가장 가까운 악기는 그라함과의 듀얼에 사용했던, 메인 스테이지의 드럼 세트였다. 베이스 드럼은 헤드가 처참하게 찢겨 있고 심벌은 본래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우그러져 있으며, 무엇보다 세트 자체가 균형을 잃고 쓰러져 얼핏 보면 고물을 쌓아둔 형상으로까지 보였다. 자신의 꼴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시선을 돌려보니 제 것으로 추정되는 드럼 스틱이 눈에 들어온다. 허리가 무참히도 꺾인 모습이었다. 연습 중이나 무대 위에서 스틱을 부러뜨린 전적은 양손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새 스틱을 길들여 망가진 것을 향한 미련 따위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헌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저것을 꼭 손에 쥐어야 성에 찰 것 같았다. 그래봤자 부러진 스틱이다, 쥐어봤자 드럼을 두드리는 데에 쓰지 못할 것이 뻔했다. 그럼에도 그는 손을 뻗었다.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는 거리에서, 스틱은 단테의 손끝에 의해 톡 굴러가고 말았다. 경쾌하게도 굴러가는 소리가 야속하기 짝이 없어, 단테는 힘이 들어가지 않은 웃음소리를 뱉어낸다. 바닥은 여전히 스테인드글라스의 유리 조각이며 탁한 흙먼지, 그가 흘린 땀이며 핏방울에다 이 모든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연분홍색 꽃잎으로 엉망이었다.

 꽃잎. 누군가에게 밟히기라도 했는지 상한 구석이 흐리게 보였다. 그러고 보면 한창 벚꽃이 만발한 시기였다. 어제도 히마와리가 열심히 졸라대는 통에 에덴 근처의 공터로 꽃구경을 하러 갔더랬다. 자신은 그저 다음날의, 그러니까 오늘의 이 라이브 이벤트에 출전한다는 소식을 일방적으로 전하기 위해 들렀을 뿐인데. 저를 잡아끄는 손짓이 조급했던 것을 보면 이 사태를 어렴풋이 예상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 서툰 응석이 기꺼워 흔쾌히 어울려 주었던가.
 함께 보았던 벚꽃은 제법 나쁘지 않았다. 인적이 드문 곳치곤 꽃이 화사하게도 영글었고, 그 꽃잎의 빗속을 걷는 기분도 썩 유쾌했다. 머리 위로 쭉 손을 뻗어 꽃잎을 잡으려 애를 쓰며 머리 위로 쭉 뻗은 히마와리의 손도, 그렇게 하고도 아무 수확이 없어 머쓱하게 손을 내리며 꽃잎 몇 장을 잡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이야기하던 목소리도, 제 겉옷의 모자에서 소원 몇 개 분의 꽃잎들을 발견하고 활짝 웃던 입매도, 그것들을 여럿 떠내어 바람에 날려 보내던 손끝도, 그 손목에서 배어나던 달큰한 향도, 벚꽃을 보자고 말을 꺼냈으면서 정작 꽃보다는 제 얼굴에 올곧게 꽂혀 오던 눈빛도,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여름의 이름도,

 ‘내년에 또 보러오자, 우리 둘이서.’

 당장 하루 앞의 미래가 두려워 보다 먼 미래의 약속을 다짐하던 모습까지도. 단테는 문득 그 약속을 지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당장의 생사조차 확신할 수 없는 마당에 내년의 벚꽃을 어찌 기대하겠는가. 허나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지켜져야 할 약속이다. 제 안위를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야말로 주어진 약속이었다. 내년의 봄까지, 벚꽃이 피는 날까지 무사하기로. 히마와리와의 약속을 뒤집어 보면 그러한 의미와 상통하지 않던가.
 ……히마와리. 단테는 입에 담는 것만으로 여름을 불러오는 이름을 속삭였다. 속삭임과 함께 발갛게 웃는 눈꺼풀과 투명하게 눈물짓는 입술을 떠올린다. 사랑스레 물이 든 살갗과 그보다 사랑스러운 붉음으로 저를 올려다보던 곧은 시선을 덧그린다. 그것은 기억이자 미련, 오롯이 저를 향한 애정의 일부. 어쩌면 다시는 손끝에도 스치지 못할……. 상념을 끊어낸 그가 다시금 손을 뻗었다. 스틱이 굴러간 방향이었다. 지금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드럼 스틱을 거머쥐는 것뿐이다. 수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단 하루도 놓아본 적 없는 물건이었다. 한평생을 드럼과 함께한 자신인 만큼 언제나처럼 스틱을 쥐는 것이 곧 살아 있다는 증명이 되리라. 그리고 그것으로 약속은 지켜지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초라한 위안에 불과할지라도.

 “어허, 답지 않게 왜 이러시나. 오랜만에 멱살 한번 잡혀볼래?”

 침잠하는 의식을 파고든 것은 낯익은 목소리. 언제 바닥을 향했는지도 모를 고개를 들자 장난스레 찡그린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다. 황금이라 하기에는 아스라하고 순백이라 하기에는 불순한, 그야말로 안온한 태양과도 같은 색. 단테는 그 눈동자의 주인을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유, 제스?”
 “여어, 오랜만!”

 호쾌하게 웃어 보이는 얼굴은 단테가 기억하는 15년 전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그렇게 따지면 진즉 죽은 동료가 눈앞에 나타났다는 사실부터 태클을 걸어야 했다. 이런 타이밍에 나타난 헛것이라면 주마등의 일부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미리 말해두겠는데, 나 너 데리러 온 거 아니다? 저승사자로 전업한 기억은 없거든.”

 만약에 진짜 저승사자라고 해도, 얼굴 보자마자 뭐라고 할 게 뻔한 너를 내가 왜 맡겠냐. 다른 저승사자한테 맡겨놓고 한참 후에나 인사하러 갔겠지. 산뜻하게 흩날리는 백금발은 그 목소리만큼이나 가벼워 보였다. 지금 농담이나 할 때인가. 단테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입을 열려다 도로 다물었다. 이런 비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비현실적인 존재에게 시답잖은 말을 건넬 정도의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하핫,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은 표정이네. 내가 왜 네 앞에 나타났는지 궁금해?”
 “……그래.”

 힘겹게 입술을 달싹이자 그에 대꾸하듯 유제스의 코트 자락이 흩날린다. 새하얀 코트를 입은 익숙한 뒷모습이 문득 멀어졌다가 눈을 한 번 깜박이는 사이에 도로 가까워졌다. 단테가 헛것이 보이기 시작했다며 혀를 차든 말든, 유제스는 뒷짐을 진 채 주절거린다.

 “뭐, 이런 상황에서는 말동무가 있는 편이 버티기 좋잖아.”
 “…….”
 “그 말동무라는 게,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한 대 후려 패고 시작하겠다고 벼르고 또 벼른 얄미운 녀석이라도 말이지.”

 너라면 날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을 게 뻔하니까~. 본인을 향한 객관적인 평가를 정확히도 짚어낸 유제스에게 단테는 대답 대신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말대로다. 멋대로 밴드를 해산시키고 설명을 듣기도 전에 멋대로 죽어버려서, 결국 끝까지 의중을 알지 못한 채 빛바랜 원망만이 남았다. 지옥에서라도 만난다면 있는 힘껏 그 면상을 날려버릴 생각부터 하고 있었건만, 하필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이런 상황에서 재회할 줄이야. 억울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그 억울함과 원망의 크기만큼 유제스의 노랫소리를 사랑해왔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날 때리려면 백 년은 일러. ‘히마와리’랑 같이 백년해로하다가 천수를 누리고 오라고!”
 “……히마와리를, 알고 있나?”
 “알지. ……응, 지켜보고 있어. 지금도 그렇고, 아마 당분간은 쭉.”

 참고로 무사히 빠져나가서 일행이랑 합류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지금은 너 때문에 울다 지쳐서 잠든 것 같지만. 묻지 않은 소식을 전해주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걸린다. 백금의 눈동자에 비치는 제 표정은 영락없이 안도와 염려가 뒤섞인 그것이라, 단테는 허 하고 얕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 단테가 이렇~게 누군가를 애틋하게 여길 수 있었을 줄이야. 놀랄 노 자라니까.”
 “시끄럽다.”
 “그렇게 애틋해 하면서, 약속은 지킬 생각도 않고.”

 질책하는 것이 명백한 말투에 조금은 부르튼 감이 있는 얇은 입술이 순순히 다물린다. 그래, 유제스의 말대로 자신은 제 목숨을 어렴풋이 내려놓고 있었다. 제아무리 긍정적인 사고의 인간이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별수 없이 포기하고 말리라. 무너진 라이브 회장의 잔해 속에 망가진 악기들과 함께 남은 자신의 음성 따위는, 그 누구에게도 닿지 못할 터였다. 이 무력감과 절망감은, 이전에도 질리도록 맛보았던 종류의 것이다.

 “그때도 결국은 네 목소리를 들은 사람이 나타났잖아. 히마와리 말이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부드러운 목소리. 단테는 유제스가 제 속내를 읽기라도 하는 것 같다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이 옳다는 듯 맑게 지어 보이는 웃음을 알아채지 못하고, 그저 가까이서 희미한 빛줄기처럼 쏟아지는 속삭임에 귀를 기울인다.

 “한 가지 물어보겠는데, 단테. 너는 아직 살고 싶어?”

 유제스의 양팔은 여전히 등 뒤에 감추어져 있다. 그 손에 무엇을 쥐었는지, 어쩌면 그 무엇도 쥐지 않은 맨손일지도 모른다. 이 물음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의도를 품고 묻는 것인지, 순수하게 궁금했을 뿐인 질문인지조차 분간이 가지 않았다. 평소라면 야생동물처럼 벼린 감각으로 알아챘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단테는 제가 아는 한 가장 단순하고 어리석었던 이의 의중조차 헤아리지 못한다.

 “지금 네 상태는 누가 봐도 중환자야. 당장 병원으로 이송한들 이전처럼 회복할 수 있을까? 혹시 몰라, 팔이나 다리를 잃거나, 어쩌면 신경이 망가져서 드러머로서 영영 죽어버릴지!”
 “…….”
 “드럼 앞에 앉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할 놈이잖아, 너.”
 “……그래서.”
 “그럼에도 너는, 아티스트로서 죽어버린다 해도 단테라는 인간은 계속해서 살아가길 바라는가? 나는 그걸 묻는 거야.”

 조곤조곤한 목소리는 최악의 가능성을 상기시킨다. 유제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단테의 삶은 곧 드러머로서의 삶이었으므로. 그것 외의 삶은 상상할 수 없고 상상할 생각조차 없으며, 무엇보다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영원히 드럼과 함께하리라고 확신한 탓이다. 하지만 만약, 그럴 수 없다면. 확신하다시피 한 미래가 저를 배반한다면. 낮게 깔린 심홍색 눈동자를 찬찬히 깜박인다.
 그 가정은 제게서 드럼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시절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단테에게는 미래를 기대케 하는 것이 드럼 외에도 하나 더 있었다. 사랑스럽도록 아득하고 따사로워서, 차라리 복에 겨운 꿈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더 어울릴 듯한 여름. 그 해사한 계절을 앞두고 무릎을 꿇고 만 단테가 입술을 달싹인다.

 “……나는 이미 한번 죽은 몸이나 다름없다.”
 “…….”
 “그런 내게 두 번째 삶을 영위시킨 게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
 “지금 이 목숨의 권한은 내게 있지 않아. 그러니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고……!”

 이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 히마와리를 안심시키기 위해 했던 말이지만 동시에 스스로에게 거는 암시이기도 했다. 너를 두고 죽지 않는다, 죽을 수 없다. 다 타고 남은 재에 불과했던 자신에게서 거듭 타오를 불씨를 발견한 것은 다름 아닌 너다. 그렇다면 이 두 번째 불길은, 삶은 너의 것이다. 네 손에 쥐여 주마. 네 좋을 대로 거머쥐어 마땅한 것으로써 넘겨주마. 그러니 네가 제대로 쥐어보지도 못한 채 꺼트리지 않으리라. 빛을 잃고 스러져가던 단테의 눈동자에 무언가가 요동치기 시작한다. 분노보다 맹렬하고 집념보다 지독한 것. 유제스는 그 불온하고도 아름다운 불길이야말로 히마와리가 사랑해 마지않는 그의 애욕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하, 이래야 단테지.”

 줄곧 등 뒤에 숨겨왔던 무언가를 꺼내 드는 목소리가 살갑다. 몸을 낮춰 손끝을 움찔거리는 게 고작인 단테의 손바닥에 매끈한 감촉을 미끄러트리는 미소가 그리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무리 팔을 뻗어도 닿지 못했던 드럼 스틱은 애초부터 부러진 적 없었다는 것처럼 날렵한 선을 자랑하며 단테의 손에 닿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대답 대신 스틱을 강하게 움켜쥐자 ‘그거면 됐어.’ 하고 속삭이던 음성이 아득하게 멀어진다. 예고도 없이 멀어지는 기척에 눈을 돌리면, 그 모든 것이 헛것이었던 양 백금발의 머리카락도, 새하얀 코트 자락도, 태양 같은 눈동자도 사라지고 없었다. 단테에게 남은 것은 그저 멀쩡한 드럼 스틱 한 쌍과, 이런 절망에 파묻혀 죽지는 않겠다는 오기뿐. 떠듬떠듬 부자연스러운 손짓으로 애써 스틱을 매만지고 있자니, 저 멀리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아…면…… 답해……!”

 유제스의 쾌활한 목소리와는 다른 종류의 것. 보다 묵직하고 두터운…… 이 역시 아는 음성이다. 단테는 후 하고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드럼 스틱으로 제 근처의 흑색 잔해를 강하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볼품없는 박자의 리듬은 분명 멀리까지 닿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가 한계였다. 연주조차 되지 못한 소리에 인기척이 점점 가까워진다. 팔이 으스러질 것 같은 격통에 침음하던 단테는 이내, 자신과 멀지 않은 드럼 형상의 고물더미로 시선을 옮겼다. 무대 위에서 관객의 환호성을 유도하듯 자신의 눈과 목표물 사이의 직선 위로 스틱을 겨냥하고, 있는 힘껏 내던진다. 잔뜩 우그러진 심벌은 여전히 챙 하고 경쾌한 소리를 내는 법을 기억하고 있었다.

 “……! 이쪽으로!”

 그래, 네가 온 건가. 자신과 비슷한 구석이 있는, 한번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남성. 단테는 머리 위 잔해의 틈 사이가 서서히 벌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소리 없이 그의 이름을 발음했다. 노에인, 지난겨울의 배 위에서 함께 미련 없는 무대를 선보였던…….

 “……너도 명줄 한번 질기군.”
 “유감, 스럽게도…… 말이지.”
 “나로서는 그날의 빚을 갚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말에 단테가 웃어 보였다. 유제스의 말대로, 그리고 제 고집대로,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닌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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